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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의 삶과 만행 - 과거와 현재..크게 다를 바 없다.

Sstube Tistory 2017. 2. 2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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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치, 연산군의 폭정의 핵심이였던 장녹수 -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MBC 월화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은 홍길동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배경은 연산군 시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역적은 아모개 역에 김상중, 홍길동 역에 윤균상, 연산군 역에 김지석,장녹수 역에 이하늬로 탄탄한 연기력으로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가무가 능하였다는 장녹수 역에 배우 이하늬씨는 국악전공자로서 장녹수 캐릭터에 완벽하게 소화하며 몰입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폭군으로도 유명한데요. 폭군 연산군의 마음을 뒤흔든 여인 장녹수에 대해 알아봅시다. 



[연산군일기]로 본 장녹수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大君)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 [연산군일기] 1502년(연산군 8) 11월 25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창기가 된 장녹수는 30세이지만, 16세와도 같은 외모를 지닌 동안이였으며,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네요.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하여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었다.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냈고, 금은주옥(金銀珠玉)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ㆍ전답ㆍ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

- [연산군일기] 1502년(연산군 8) 11월 25일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장녹수는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는데요. 요즘 시대상과도 오버랩되는 분위기 입니다. 장녹수는 남의 재산을 함부로 강탈하였으며, 각종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는데요. 그녀 덕분에 장녹수의 주인이었던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金守末)은 계속해서 벼슬이 올랐습니다. 이는 “왕이 이때 한창 장녹수를 사랑하여 그 말이라면 모두 따랐기 때문에 특별히 승서(陞敍)한 것이다”라는 실록의 기록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임술ㆍ계해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포(狂暴)한 짓이 많으므로 소혜왕후가 걱정이 되어 누차 타일렀지만 도리어 왕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외부에까지 왕왕 듣고 서로 보여 귓속말을 하며 그윽이 근심하게 되므로, 소혜왕후가 또다시 몰래 대신들에게 유시(諭示)를 내려 간절히 간하게 하니, 왕이 더욱 분해했다. 그리하여 항상 조정에 구애되어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나 발로할 수 없었다.

- [연산군일기] 1506년(연산군 12) 9월 2일


장녹수에 빠져 연산군의 방탕과 폭정이 심해지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는 크게 근심하여 충고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연산군의 원망만 사게 되며, 더 이상 잘못된 상황을 발고할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나날이 심해지는 연산군의 폭정, 그리고 장녹수의 만행


장녹수는 궁 밖의 사가를 재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버리게 하였으며, 모습이 고운 두 여인을 시기하여 두 사람의 부자 형제를 하루아침에 다 죽이게도 했습니다. 옥지화라는 기녀는 장녹수의 치마를 한 번 잘못 밟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장녹수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자, 그녀의 위세를 엎고 장녹수의 하인들마저 행패를 부렸는데요. 동지중추부사 이병정은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생겼는데, 오히려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쯤 되니 모두가 출세하기 위해 장녹수 앞에 줄을 서게 되었는데요. 기록에는 “무뢰(無賴)한 무리들이 장녹수에게 다투어 붙어 족친(族親)이라고 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장녹수와 그 측근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은 높아졌고, 결국 연산군의 몰락으로 이어지며, 장녹수는 참형에 처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장녹수는 죽어서도 백성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는데요. 장녹수 시체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백성들은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며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장녹수가 빼앗아 쌓아두었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으며, 장녹수의 하인들은 남의 집 재산을 빼앗기도 하고 사람을 때려 다치게 했다는 죄목으로 형벌을 받았으며, 대간들은 장녹수의 사례를 들어 이를 경계하고 나라에 예법을 세울 것을 간하였다고 합니다.


과거와 현재..크게 다를 바 없다.


자료출저 - 네이버캐스트-인물한국사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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